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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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이지만 그의 행적 중에 북조선 당국에 의해 과장 왜곡된 내용이 많아 실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조선혁명군, 반일인민유격대(그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 등을 조직했다. 해방 후 1948년부터 1972년까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총리, 1972년부터는 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었고, 1990년 국가주석에 재선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2][3] 또는 金聖柱[4][5])였는데, 항일 투쟁을 하면서[4][5][6] 김일성으로 개명[4][5][7]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하였고, 한국 전쟁 휴전 후에는 정적 숙청으로 권력기반을 강화하였으며, 1970년에는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고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인 주석직에 올랐다.

1966년 10월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고 1970년에 진행된 제5차전당대회와 1980년 10월에의 6차전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또다시 재선되었다. 동시에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최근까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고 1990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재선되었으나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김정일에게 넘겼다. 1994년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던 그가 사망하면서 아들 김정일에게 모든 권력을 승계하였다.

천리마 운동으로 한국 전쟁 이후 피폐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시켰다.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하였는데, 1980년대한민국의 일부 운동권에서는 그의 주체사상 노선을 받아들인 그룹도 있었다. 한편 소련군행적, 한국 전쟁 배후 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독립운동 여부에 대해서는 인정과 불인정하는 시각이 양립하고 있다. 기독교가계 출신으로 기독교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으로 바뀌었다. 평안남도 출신.

Contents

생애

출생과 가계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하리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7]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8], 1892년~1932년)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의 전주 김씨 12대조 김계상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7][9]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증조부 김응우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종군하였다. 북조선에서는 김응우가 제너럴 셔먼 호 격퇴의 지휘관이라 주장한다.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집안의 묘지기였으며,[10]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한국의 독립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4] 김형직의 동생이자 그의 숙부였던 김형권역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였다.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 장로교 신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10]는 칠골교회의 장로[11]였다.[4]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10]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보현이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성주(成柱, 또는 聖柱)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생가는 만경대라는 이름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어린 시절과 소학교 [편집]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무송(撫松)으로 이사했다.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장백현 팔도구에서 팔도구소학교를 다녔다. 1919년 7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온 그는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12]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10]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창덕학교의 교감교장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김형직의 "혁명을 하자면 자기 나라를 알아야 한다"라는 권고로 부터 1923년 3월 중국 팔도구로부터 만경대까지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통학하며 외가집이 있는 칠골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이다.[13]

또한 아버지 김형직의 권고로 중국말을 배우고 중국인소학교에서 중어공부를 하여 중어의 자유로운 구사가 가능했다.[14] 그러나 아버지 김형직1926년 그의 나이 14세 때에 사망하게 되면서 그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청년기와 항일운동 시기 [편집]

공산주의 단체 조직 활동 [편집]

북조선 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열세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송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지린 성 지린으로 가서 유원 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15]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화성의숙은 반일민족주의단체가 중국 화전에 세운 2년제 군사정치학교라 한다.[16] 1926년 10월 17일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고 그 뒤 그 책임자로 선거되었다.[6][17] 1927년 길림성 중국인 학교인 육문중학교에 다니다가 1929년 반일활동으로 중국 군벌 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7]

육문 중학교 재학 중 김일성은 1927년 8월 28일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했다.[18]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 조직에 가입, 국민부에서 일할 무렵(1929년에서 1931년 사이) 이름을 김일성으로 개명한다.[7] 이어 조선공산청년회에도 가담하는데, 조선총독부 관헌이 작성한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주요 인물로 기록되었다.[12] 1929년 가을 반일(反日)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 군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수감중 그는 육문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12] 1929년 길림 제5 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4][5] 당시 그는 이종락의 부하로 활약했으나 북조선에서는 이를 부인한다.[4][5]

항일 무장 투쟁 [편집]

동북항일연군, 보천보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0년 6월 30일 지린 성 창춘에서 카륜 회의를 하였다.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진행된 카륜회의에 참석하였고[19] 7월 3일 카륜에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조직하였고 7월 6일에는 이통현 고유수로 가 항일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정치 및 반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20]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과 만주의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별적 혹은 연합으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12]자 그도 1932년 4월 25일 상비적인 혁명무력인 반일인민유격대(그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를 창건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지도하였다.[21] 그가 속해 있던 동만(東滿:당시 간도지방)의 항일유격대가 확대·발전하여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재편성되자 1934년 가을에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이름이 바뀌자 그는 계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배속되 활동했다. 1936년 3월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통합, 재조직되면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7월 다시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가 개편되자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1936년 5월 항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그도 광복회 결성에 가담하였다.

그의 무장 투쟁은 1937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작은 규모의 보천보 전투가 최고 성과로 여겨지며, 이 전투에서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설이 존재한다. .[4]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때때로 조선의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4]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위원장이었던 위증민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던 데 비해 김일성의 현상금은 1만 으로 오르게 되었다.[4]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대편제의 개편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단 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1939년말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항일빨치산에 대한 대토벌전으로 항일연군은 계속 패퇴하면서 그의 조직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군 토벌대가 항일연군 중 김일성부대를 주요 목표로 정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오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북만주를 거쳐 국경을 넘어 1940년초 소비에트 연방으로 피신했다. 실질적으로 김일성은 중국의 만주 지역 항일조직인 동북인민혁명군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40년 소련으로 건너갔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중에도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25일 화룡현 홍기하에 있던 마에다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 습격에서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노획했으나, 북조선에서는 그다지 조명 받지 못하는 사건이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제시했다.

1940년 소비에트 연방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후 소련군 대위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독일이 패배하고 일본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5]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5] 8월 26일부터 김일성은 비밀리에 정치활동을 시작,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광복 직후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소좌로 진급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스티코프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의 그의 호칭은 '사령관 동지'였다.[22] 1945년 10월 8일10월 9일에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동의해주지 않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창건 목적을 발표하였다.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3차 확대집행위에서 김일성은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광복 이후

광복 시기

김일성은 해방 후의 한국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23]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북한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했다.[24]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이 각각 선출되었다. 2월 8일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로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당을 장악한 동시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다.[25]

공산당내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출범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처음에는 민족주의진영의 인사와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의 인사가 동등한 합작전략을 사용하였으나, 그러나 후에 점차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의 가입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수를 늘려 결국 그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장악하고 이후 북조선내 다른 지역의 인민정치위원회들 역시 장악하였다.

초기에는 3·1 만세 운동부르주아들만의 투쟁으로 보았으나 3·1 만세 운동을 인민봉기로 재평가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김일성 주관하에 《3. 1 인민봉기 27돐 경축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를 파탄시키려는 암살자들에 의하여 주석단 가까이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6] 그러나 김일성은 재빨리 단상에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정숙은 행사가 끝난후 경위대자동총소대원들에게 경호의 허술함을 지적하였다.[27]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1946년 3월부터 슬그머니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28][29] 1946년 3월 김일성은 북조선로동당 당수에 취임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서울조선공산당에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이때부터 남조선로동당과 당대 당의 관계로 대하게 되었다.

남북협상 [편집]

1948년 2월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발전시켰다. 1948년 1월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제의해왔고, 4월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하였다. 최고지도자연석회의를 주관하고 김두봉과 함께 김구, 김규식과 4김회담을 하였다. 5월 김구김규식은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김구, 김규식에게 2차 남북협상과 최고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편집]

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시절 [편집]

북조선에 대한 소련의 수탈과 김일성의 협조 [편집]

1945년 일본의 항복 뒤 소련군은 북조선에 진주하였는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비행에 대해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북한여성에 대한 유린, 상인들에 대한 수탈을 수차례 자행했으며, 이는 북조선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양호단과 같은 자위 단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군은 일본과 치른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환으로, 북조선의 수력 발전소 시설, 공장시설, 그리고 북조선 쌀 농사의 1/4 를 공출하는 등 심각한 경제 수탈을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결과로 북조선에서 수만명의 탈북자가 남한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출처 필요] 김일성이 소련군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공화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시기 [편집]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수상이 되고[30],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 실시, 무상교육제도(북조선에서는 11년 무상교육제를 뜻한다.)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자원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3월 박헌영소련을 방문,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1949년 남북 조선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공식적인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기 이전에, 북조선에 이미 노동당을 통한 사실상의 일당 정권을 수립하였고, 조선 철도경비대등의 창건을 통해 군사적인 기반도 마련한 상태였다. 이는 이 시기까지 혼란에 휩싸였던 남한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여러 정치적 세력과 정당의 공존을 수용하였던 남한과는 달리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기반으로한 북반부 단독정부 수립이 사실상 남한의 정부 수립 훨씬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9년 6월 30일 북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1949년에 독립 운동가 김구, 김규식 등을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김구, 김규식 등의 주장과 북조선의 단독 정부를 세우자는 김일성의 주장이 서로 달라서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출처 필요]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625전쟁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쵸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구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31]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공화국 정부 수립시 김일성에 의한 친일파의 등용 [편집]

북조선 정권에서 기용한 친일인사로는 장헌근 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 문화선정성 부부상 친일 밀정, 김정제 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등이 친일인사로 지적되고 있다.[32]

한국전쟁시 김일성의 남침결정과 소련의 지원 [편집]

소비에트 연방 붕괴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시초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스탈린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1950년이 되어서야 남침을 허가하게 되었다.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의 군사 지원은 보류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등 비교적 간접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군사 지원은 중공의 모택동이 하게 되었고, 이 약조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3월부터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직, 간접적인 지원을 요청하였고, 또 이를 승인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미국이 UN 군으로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고, 그래서 김일성의 계획을 반대하였지만, 내전을 끝낸 중공의 모택동은 북한의 남침을 적극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소련의 승인과, 중공의 대규모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남침에서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판단, 6월 25일 새벽 대한민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했지만 패했다. 오히려 1950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덕천을 거쳐,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가는 일이 생겼으나, 중공군의 도움으로 12월에 평양을 수복했다. [1]

전전 정적 숙청 작업 [편집]

한국 전쟁의 패배로 김일성은 궁지에 몰렸으며, 전쟁에 실패한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다.[33] 이후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패전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림으로써 북조선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인 1945년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민족주의자 조만식평양시 고려호텔에 감금한 뒤 1950년 10월 처형하였고[34] 1952년 연안파인 무정, 1953년 같은 소련파의 라이벌이던 허가이를 제거하였다.

전후 복구 시기와 전후 정적 숙청 작업 [편집]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가 되어 칭호는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년 7월 28일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35] 그때부터 박헌영남로당파, 김두봉연안파, 허가이소련파를 숙청하여 권력 체제를 구축하였다. 1958년 3월에 열린 전국청년사회주의건설자대회에 참관, 청년들은 당의 령도밑에 자기 손으로 밝은 새 시대,새로운 사회주의시대를 개척해야 한다고 하며 모든 청년들이 자기의 열정과 지혜와 능력을 사회주의건설에 바칠것을 주장하였다.[36]

1958년 11월 약산 김원봉을 차례로 숙청, 살해하였다. 1953년부터는 박헌영의 구 남조선로동당 계열에게 한국 전쟁 패전 누명과 미국 간첩들과 교신했다는 누명을 씌워 임화·이강국 등을 살해하고 남로당계를 체포, 구금 고문하였으며 1955년 박헌영을 체포, 반당종파행위 등의 누명을 씌워 1955년에서 1956년사이에 처형하였다.

주체사상 확립 [편집]

연안파에 대한 숙청은 서서히 진행되어 1956년 주영하, 내무성 부상 이필규, 문화선전부 부상 정률 등이 처형되었다. 한편 중국계였던 최창익은 김일성에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한다.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할 무렵인 8월 30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과 소련파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화를 주장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귀국후 김일성은 1957년 최창익을 반당종파행위로 숙청하였고 김일성의 권력집중화와 일당독재를 비판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1964년 숙청당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국·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대규모의 산업 시설과 교통 시설, 그리고 복지 시설이 모두 파괴되자 산업 시설들을 복원하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인 천리마운동을 195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항운교통의 중심인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소련의 원조를 통해 계획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2세계 간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서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 간의 폭넓은 외교활동을 실시하였으며, 국민들의 계몽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평양직할시를 공식적인 수도로 지정할 것(실제 지정은 1972년이다. →평양직할시 연혁)을 결정하였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천리마 운동 [편집]

한편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모순을 지적, 비판하며 자본주의체제는 비인간성과 자체모순에 의해 자멸하고 결국 사회주의(社會主義)로 전환된다는 신념 하에, 인류 역사는 물질과 계급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념을 자신의 신념을 확립, 강력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인민들을 교육하였다. 김일성은 전후복구 뒤 경제살리기의 목적으로 천리마 운동을 실시하였다. 본래 1956년의 김일성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작된 것으로[37] 김일성의 권력강화에 반대하는 소련파, 연안파 등의 반발과 비판으로 1957년부터 시작될 예정인 경제5개년계획을 앞두고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숙청한 뒤 자본·물자·기술 등이 부족한 정국에서 내부 역량과 인민의 자발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했다고 판단, 이를 위한 집단적 증산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12월 전원회의 직후 김일성은 강선제강소를 방문하여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인민에게 직접 자력갱생의지를 호소하면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선포하여 주민들의 생산 증대의욕을 촉구하면서 확산되었다.[37]

4·19 전후대응과 통일론 [편집]

1960년 북한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38]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38]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38]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38]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은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38]

한편 그는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남한내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을 하게 하기도 했다.

1960년 여름 연방제통일론을 발표하였으나 장면 내각에 의해 거부당하고 장면내각은 외무부를 통해 반박하였다. 5.16 군사 쿠테타 이후 1963년 비밀리에 대한민국대통령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을 보냈으나 살해되었고, 68년 두 번째 밀사로 부총리 박성철을 내려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응답으로 1971년부터 이산가족 명부확인과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었으며, 박정희이후락을 평양에 파견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주석 추대 이후 [편집]

권력기반 강화 (1972 ~ 1990) [편집]

김일성의 초상화.

스탈린 사후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이 단절되거나 소련 내부의 공산주의 평가 분위기 변화 그리고 중국에서의 문화혁명과 그 후의 평화 외교 정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의 지원도 어렵게 되자 김일성은 자주 노선, 자립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1970년 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하였다.

1972년 5월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 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꾼 다음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12월 15일에 채택된 새로운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그는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 10월에 있은 당 제6차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또다시 뽑혔다. 1980년 10월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하였다. 1993년 4월에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의 10대강령을 제시하였다. 한편 그는 후계자로 김영주, 김평일을 내정하였으나 이들이 김정일(金正日)과의 후계구도 경쟁에서 패하자 김정일을 후계자로 승인했다. 이후 김정일에게 정치 경험을 쌓게 한 후 서서히 당권과 군권을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부자 간의 다소 갈등 있었다.

국가주석 재선과 말년 (1990 ~ 1994) [편집]

1988년 대한민국에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올림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참석 여부 논란이 있었으나 이를 일축했다. 김일성은 1990년 5월 2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추대되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13일 인민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93년에는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남한의 지도자 김영삼과 회동을 약속하였고 1994년 6월 평양에서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방문을 받고, 핵문제와 관련한 조미협상을 진행하였다.

1994년 7월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카터 면담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 준비가 진행되던 가운데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39] 사망하기 전 북조선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유훈 통치라는 이름으로 지금 북조선 정치체제의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 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조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남정책문제로 아들인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40]

추모 행사 [편집]

김일성이 사망한 뒤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벌어진다. 이 추모 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북조선은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평양 모란봉구역에 대형 추모탑을 세워놓고, 지방 도시에 1개씩 세웠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라고 했다.

1997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이른바 '수령 우상화 정책'을 펼쳐 김일성이 생전에 살았던 금수산의사당을 확장하여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부르도록 하고,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맞이하여 4월의 봄 예술축전대회를 개최하고, 김일성의 동상을 지방에 세웠다. 김일성이 생전에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성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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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일성 주석의 생애 마지막 친필인 김형직사범대학 제호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시대동북인민혁명군에 의해 불러진 것을 1993년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에 내부에 전시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또한 그는 서예 활동에 대해서 적극 참여하였는데, 북조선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려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조선의 종합대학중의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특히 김일성은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비밀리에 들여와 읽었다고 한다. 1989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황석영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김일성 주석이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다.[41]

기타 [편집]

배움의 천리길 [편집]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

북조선에서는 그의 '배움의 천리길'을 기념하는데, 이는 그가 1921년 만주 팔도구에서 칠골로 유학한 일이라는 설과[10] 1925년 칠골에서 만주로 건너간 일이라는 설이 있다.[7] 생전에 70여개 국가와 국제기구들로부터 180여개의 최고훈장과 메달, 30여개도시의 명예시민칭호, 20여개의 이름있는 다른 나라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 명예박사칭호, 169개 나라 당 및 국가, 정부수반들과 진보적인민들로부터 16만 5,920 여점의 선물을 받았다.[42]

종교 [편집]

그의 부모가 기독교 신자였고 외조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 외삼종조부 강량욱은 모두 기독교 장로교 목사였다. 유년기에 교회에 다녔다는 의견이 있으나 김일성이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긍정적 평가 [편집]

김일성은 북조선의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와 공업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정책들을 입안했다. 1956년남포시에 있는 제철공장 방문한 뒤 천리마운동을 실시하였다. 천리마운동 기간에는 공업 현대화가 진행되고 남포항과 평양역 같은 산업교통시설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 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조선 경제에서 공업의 비율이 70퍼센트를 차지했을 만큼 놀라운 공업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조선1990년대 중국과 나란한 발전된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이 낙후된 농업 국가가 되었다.

그는 또한 항일운동에도 이바지했다. 1937년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시대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은 가운데, 그가 일으킨 보천보 전투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있다.

부정적 평가 [편집]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창시했다. 이렇게 창시된 주체사상은 북조선 인민들의 사상과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무차별식으로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해서 식량생산의 자급률을 떨어트리는 등 농업의 낙후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김일성 진위 논쟁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김일성 가짜설입니다.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북조선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43] 또 다른 주장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이명영(李明英)의 《진위 김일성 열전》,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직후 집회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徐大肅) 등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 단체의 위원장급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다.), 그밖에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고 근거로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綴洙)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 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미화 논란 [편집]

문인들은 김일성 찬양에 앞장섰다. 김일성은 46년 위대한 우리나라의 태양으로 예찬되었으며,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의지이며 우리 민족의 신념이며 희망으로서, 우리 민족의 샛별로 묘사한 조기천의 약3천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47년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 학교의 교과교재로 채택, 사용되었다.[44][45]

신형기는 김일성의 과거의 영웅적 풍모를 알리는 일화와 기사, 그리고 문학작품들은 특별한 기획이나 지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44][46]

김일성 항일운동 논란 [편집]

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에 대해서는 이견의 소지가 있다. 북조선의 공식 기록에는 김일성은 비교적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항일 운동가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자의 능력이나 생애를 과대 평가하는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상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조작되고 과장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짜 김일성설이다. 하지만 가짜 김일성설을 지지하지 않는 측에서도,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과장되고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항일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과 일본의 전쟁을 소련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이므로 항일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우익 성향의 문서나 관변문헌과 북조선 문헌들의 김일성 활동 서술은 대조적으로, 이는 북조선의 문헌들이 그의 활동을 사실 이상으로 미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라는 평도 있다.[12]

3.1 운동 기록 논란 [편집]

유관순 등을 3.1 만세 운동의 주요 인물로 평가하는 대한민국이나 세계 다른 국가들의 역사관과는 달리, 북한은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을 선두로 평양에서부터 전개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주역을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격퇴했다는 주장도 있다.[32]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 3·1운동을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 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기술해왔다. 그러나 1980년부터는 평양 장대제에 있던 숭덕여학교에서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북한 선전매체는 "이 날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울린 종소리를 신호로 김형직이 몸소 육성한 애국적인 청년학생과 인민을 선두로 10여만 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는 1917년 김형직이 결성한 '조선국민회'가 3·1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유관순 열사의 항일운동도 김형직이 지도한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심지어 3·1운동 당시 김일성이 7살의 어린 나이에 만경대에서부터 평양성까지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북한 정권이 김일성뿐 아니라 항일 역사와 전혀 관계 없는 김일성의 아버지, 할아버지 등도 항일 투사의 전형으로 묘사하며 이들에 대한 가계 우상화물을 북한 곳곳에 설치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형직을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킨 선구자'로 칭송하며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인민병원 등의 칭호를 붙였으며 양강도 북쪽에는 '김형직군(郡)', 그의 숙부 이름을 딴 '김형권군'(郡)까지 설치됐다.

보천보 전투 논란 [편집]

북조선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지난 50여 년 동안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 자료로 이용해 왔다. 북조선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하였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이 교시했다는 연설문도 싣고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 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하여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조선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김일성 부대는 보천보 전투 이후 1938년 말부터 일제 토벌대에 추격당해 장백현으로 이동했다. 1938년 12월~1939년 3월 사이 100일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몽강현으로부터 압록강 연안 북부 국경일대를 향해 이동하게 된다.

북조선은 당시 김일성 부대가 일제 군경의 포위와 극심한 식량난,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등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난관을 물리치고 행군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뉴라이트에 의하면 일제 때 있었던 '고난의 행군'은 북조선당국의 명백한 경제실정으로 인한 대아사 사태와 식량난을 호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민들로 하여금 현재의 경제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당연시 하도록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출처 필요]

한국 전쟁의 책임 [편집]

한국 전쟁의 주동자라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이 주동자는 아니며 소련스탈린, 중국마오쩌둥이 배후조종했다는 주장, 미국이 고의로 1949년 미군을 철수하여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도 있었으나 소련에서 한국전쟁 관련 기밀문서가 대량으로 비밀 해제돼 1948년 말경부터 북이 전쟁을 준비했음이 밝혀졌다. 이 문서에는 김일성이 1949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남한의 북침준비를 빌미로 스탈린에게 대남공격 승인을 요청했으며 스탈린이 1950년 4~5월 개전동의를 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좌우명 [편집]

인민을 하늘처럼 위한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집권하에서 개인 우상화 및 심각한 인권유린과 민중탄압이 자행되어왔고 그것이 현재진행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가족과 친척 [편집]

김일성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참고 자료 [편집]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기관지 《조선신보》.
  • 《조선일보》와 자매지 《월간조선》(2005년 7월).
  • 고등학교 심화선택과정《한국 근·현대사》.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항일혁명편

함께 보기 [편집]

주석 [편집]

  1. 당국의 공식적인 발표,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특성상 공식 사망원인이 바로 실제 사망원인과 일치하는지는 의문이다.
  2. 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8). "김일성"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ML). 2008년 5월 21일에 확인.
  3. 북한연구소 (2008). "김일성(金日成)" (HTML). 2008년 5월 21일에 확인.
  4.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244쪽. ISBN 89-7474-870-3
  5. 신주백 (1993).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5~222쪽쪽
  6. 같은 책, 217~218쪽쪽 “조선혁명당 군사령부 참모를 역임했던 김학규(金學奎)의 자서전을 직접 인용하여 보면, "지금 북한의 괴수 김일성은 …… 그는 육문중학에서 공부하면서 길림에 있는 소년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를 조직하고 그가 대장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다니던 것이 기억되며, ……."”
  7. 김창희 (2001년 4월 2일). 〈김일성, 북한의 영원한 지도자〉,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초판 2쇄, 서울: 인물과사상사, 312~344쪽쪽
  8. 주진오 (1993). 〈기독교, 김일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7~218쪽쪽 12사도의 대표 격인 베드로(헬라어 페트로스를 음역한 말. 마태 복음서에 따르면, 그리스도교회의 '반석'이라는 뜻으로 예수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의 이름을 따 '강반석'이라고 지어줄 정도였다.
  9. 전주 김씨의 후예라는 설과 선산(善山) 김씨의 후예라는 설도 있으나, 김정일이 전주 김씨의 시조의 묘소가 있다는 말에 "남쪽에 가서 그곳에 갈 수 있으면 시조 묘를 참배하겠다."라고 답하였다.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참조.
  10. 주진오 (1993). 〈기독교, 김일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7~218쪽쪽
  11. 일설에는 목사였다 한다.
  12.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869a
  13.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14.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15.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다녔다는 설도 있다.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참조.
  16.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17.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18.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19.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20.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21.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22. http://www.ournation-school.com/OurNation/login_count.php?tb_name=tbllecture&Rel_key=792&fname=../Radio_lecture/h3-20/h3-20.htm
  23.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24.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9
  25.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9
  26. http://www.ournation-school.com/OurNation/login_count.php?tb_name=tbllecture&Rel_key=792&fname=../Radio_lecture/h3-20/h3-20.htm
  27. http://www.ournation-school.com/OurNation/login_count.php?tb_name=tbllecture&Rel_key=792&fname=../Radio_lecture/h3-20/h3-20.htm
  28.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30
  29. 북한 50년사: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10
  30. 김재영 외 (2001년 4월 2일).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초판 2쇄, 서울: 인물과사상사, 321~322쪽쪽. ISBN 89-88410-37-8-03910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당시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31. {{서적 인용 |저자=박명림 |제목=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꺾쇠표=예 |발행일자=1996-6-25 |판=초판 |출판사=나남 |출판위치=서울 |id=ISBN(13) : 9788930034777
  32.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33. 최신 북한이해(박승규 지음, 학문사, 2000) 21페이지
  34. 조만식의 죽음에 대해서는 1950년 10월 피난가다가 평양 만포진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35. 서동만, 〈한국전쟁과 김일성〉《역사비평》제51호(2000년 여름) 41쪽.
  36. http://www.chongryon.com/k/mc/kim/ryakureki/r-03-1.htm
  37. 천리마운동 - Daum 백과사전
  38.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지음, 민연, 2008) 213
  39. 사망 김일성 사망/8일 새벽2시 심근경색으로… 17일 장례식.”, 《경향신문》, 1994년 7월 10일 작성, pp. 1면. 2008년 7월 7일 확인.
  40. "호기 있다…김정일 '서울 불바다' 발언 좋아해",《조선일보》, 2009.04.21
  41. 황석영 “방북, 솔직히 후회 조금은 한다”,《뉴스엔》, 2008.11.06
  42.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43.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연합뉴스 2009-08-13
  4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72쪽
  45. 신형기 《이야기된 역사:남북한 민족 이야기가 그려낸 역사상 비판》(신형기, 삼인, 2005) 222~225쪽
  46. 신형기, 앞의 책 223쪽
  47.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60330023510201&p=segye
  48.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8060367
  49.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8060367
  50. http://www.chongryon.com/k/mc/kim/ryakureki/r-02-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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